ⓒ 레이 님
방에만 갇혀 있다간 너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집을 빠져나왔다. 네가 사라져서 그만 텅 비어 버린 집을 홀로 지켜 봐야 무슨 소용인가. 집을나와서는 무작정 걸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네 생각을 했다. 외롭게 나서는 길목길목에 너는 보란듯이 고고하게 피어났다. 왔던 길. 그리고 나아가야 할 길에도. 너는 내게서 혈액처럼 흐른다. 심장을 뜯어내면 그 속을 유영하는 너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내가 감히 너를 잊을수 있을까.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으니까. 네가 없으면 나도 없으니까. 너는 내 사랑이고 마음이고 심장이라 나는 네가없으면 살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나는 이미 혼자가 된 후였다.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우리를 깬 건 다름 아닌 나라서. 잔잔한 연못과도 같았던 우리를 동요하게 만든 것도 나라서. 붙잡을 수도 매달릴 수도 없었다. 나 때문에 미치루가 울었다. 내가 미치루를 울렸다. 내가 연못에돌을 던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터진 속을 비집고 들어오면 보란듯이 탁하게 문드러졌다. 긴 속눈썹에서부터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본순간 머리가 새하얘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를 울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 가만 안 두겠다고 큰소리쳤었는데 그게 내가 되었다. 너의 눈에서 기어코 내가 눈물을 흘리게 했구나. 단단했던 너를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무너트렸다. 그 죄책감은 실로 대단해 살기 위한 필수적인 일과조차 보내지못하게 했다. 잠에 드는 것. 밥을 챙겨 먹는 것. 기분 좋게 티비를 보는 것. 웃으며 술을 마시는 것. 그리고 특유의 평화로움. 언제부터인가 그 앞에네가 달라붙어 있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었다. 일을 끝냈더라도 결국에는 네가 없으니 끝낸 것 같지 않다. 나는 지금 막 너의 크기를 실감한다.
유난히 고요해 꼭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날이었다. 그날따라 너는 힘들어 했다. 지금까지 너무나 잔잔했던 탓일까. 나는 별 생각 없이 행동했다. 분명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는데, 바보 같이 그것도 모르고 버젓이. 그 결과 이별을 낳았다. 미치루는 평소처럼 가게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따라 진상이 많았다고. 새로 온 알바가 컵과 접시를 깨먹었다고. 그것까진 괜찮았는데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손님이 다칠 뻔했다고. 힘들다고, 고됐다고, 지치고 피곤하다고. 기대야 할 사람한테 기댔을 뿐인데. 그래, 그랬는데. 내가 거기서 피곤한 기색을 보여 버렸다. 그날은 분명 평소와 같았는데 달랐다. 네가 틱틱 짜증 냄을 시작으로, 작은 말다툼을 하다 결국엔 언성이 높아졌다. 다소 공격적인 말을이 오가며 서로를 할퀴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약하고 아픈 곳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것들을 파헤쳐 더더욱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다.
"나도 힘들다고. 누구는 한가한 줄 알아?"
지치고 피곤하다며 주제에 짜증을 늘어 놓는다. 그러다 그만 네 꿈을 무시해 버렸다. 나도 잘 알았다. 가게 일이 힘들어도 열심히 할 만큼 일을 좋아하던 모습을. 힘들게 차린 만큼 항상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가게를.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누구보다 기특한 너를. 나는 그걸 알면서도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봐왔으면서도. 아차 싶었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너는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는 씩씩거리다 결국엔 눈물을 보였다. 그래, 그만 만나자. 충격적인 말을 건내는 목소리는 잔뜩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어떻게든 달래 보려 했으나너는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던 모습을 바보같이 볼 수밖에 없었다. 머리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했고, 손은 이내 덜컹덜컹 떨려왔다. 심장은 혈액의 부재의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겨진다.
처음에는 나도 화가 났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예민했던 네가 불만이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안함과 죄책에 사로잡혀 이 생각은 금방거두었다. 당장 네가 없다고 생각하면 덜컹 겁이 나는데 이번에는 정말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전과는 다르단 걸 그 다음으로 깨달았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연락해 볼까, 찾아가 볼까, 사과해 볼까. 이러한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면 몰라도. 보고싶은 만큼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뭐든 일단 만나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손 쓸 수 없을 만큼 썩어 문드러진 자신은 외면한 채 네 걱정을 먼저했다. 밥은 먹는지, 잠은 자는지, 아직도 울고 있는지. 아, 울고 있다면 그쳤으면 좋겠다. 주제를 모르고 감히 꺼내던 걱정이다. 나도 이걸 금방 깨우쳤는지 네 걱정도 분노처럼 금방 거두었다. 애초에 걱정을 시작하고 끝낼 자격도 없었지만. 내게는 이제 후회와 고통만이 남아 있었다.
집을 나와 걷다가 오래전 자주 가던 술집에 갔다. 부러 너와 한 번도 안 왔던 곳을 골라서. 그래서인지 사장님이 얼마만이냐고 안부를 물었다. 대충대꾸하고는 자주 마셨던 걸로 여러 잔을 주문했다. 술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생간 잠깐의 공백에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어번 톡톡 두들겼다. 그 뒤로는 계속 멍하게 앉아 있었다. 주문했던 술이 나오면 곧장 입으로 한방에 탈탈 털어넣었다. 삼켜낸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씁쓸했다. 정신없이 취할때까지 이 짓을 반복했다. 그러다 얼마나 지속됐는지 셀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무뎌졌을 때쯤, 알코올은 냄새만큼 지독하게 아픈 기억을 잘도 끄집어냈다. 우리는 잊기 위해 마시지만 사실은 잊고 싶은 기억이 더욱 진하게 생각난다는 것을 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술을 누군가 잊기 위해 마시는 건 아주 가끔 해 온 짓이지만 이렇게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무언가가 버거웠던 적은 처음이다. 의자에 몸을 기대 한숨을 내뱉었다. 괜히 마셨나. 취할대로 취한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 무겁고 제멋대로인 몸을 어떻게 집까지 끌고 갈지 고민이었다.
내 시간들을 들춰보면 그 속에는 네가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시간 매분 매초, 네 모습으로 가득했다. 이런 나는 네가 없으면 정말 어떻게 살지. 앞으로가 막막했다. 너는 왠지 내가 없어도 잘 살 것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서글퍼졌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고 네게 미안해한다는 걸 알면 너는무슨 표정을 지을까. 처음 봤던 그때처럼 경멸할 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이제는 미소를 지어 줄 수도 있었다. 나를 다시 받아 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네게 너무나도 큰 잘못을 했는데 다시 만났다가는 또 상처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행복과 평온. 나는 그걸 자부할 수없었기에 네가 나를 용서해 주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받아 주는 건 너지만 내가 미안할 것 같아서였다. 동시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와 어디든 함께했던 너는 어느새 산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숨을 쉴 수 없다는 말은 꾀병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냥 하는 말도 아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로 호흡이 불가했다. 내 기억에서 너를 지우면 내 삶도 끊어질 듯했다. 그렇게 되면 아픔과 상처만이 남아 영혼이 떠나간 내 육체를갉아먹을지도 몰랐다. 바보 같이 숨을 헐떡이며 하는 후회는 보잘것없었다. 내가 조금만 더 다정했더라면.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의 이야기를 담아들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너와 헤어지지도 않고 너를 아프게 하지도 않고 울리지도 않았을 거다. 내 죄가 상기될 때마다 집행을 앞둔 사형수마냥, 몸을 덜덜 떨었다. 나는 지금 끌려가는 찰나에 서 있었다.
해조차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서인지 코를 통해 들어오는 공기가 축축했다. 그러나 캄캄한 새벽부터 항구의 사람들은분주하게 움직였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배와 사람이 항구를 오갔다. 나는 그들을 피해 파도가 치는 해변가로 한참을 걸었다. 터벅터벅이 모래로인해 자박자박이 되고, 맨발에 슬리퍼만 신은 탓에 칠척한 소리와 소름돋는 감촉이 귀와 발을 괴롭히는데도 한참을 멍하게 해변을 걸었다. 그러다발끝에 갑자기 들어온 파도가 닿으면 퍼뜩 놀라 뒷걸음질을 했다. 덕분에 정신을 차려 앞을 내다봤을 때, 검은 시야 속에 더욱 더 어둑한 바다가 수평선에 맞닿아 이어져 있었다. 그래도 바다를 보니까 살 것 같네. 기분 전환이 하고 싶어 무작정 나온 거였는데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바닷물에 뛰어들어 슬리퍼에 덕지덕지 붙은 모래알들을 씻어냈다. 그 모래알들과 함께 상처가 아주 약간이었지만 씻겨 나가는 것 같아 옅은 미소가 피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벌써 너를 잊은 건가? 그건 또 아니었다. 큰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찰나의 휴식일 뿐.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입원하면 어떤 환자든 산책을 권유한다. 그 환자의 병명이 작은 골절이든, 반깁스이든, 정신이 아프든, 영영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든. 나도 이 시간에 바다에 나온 이유가 이들과 같았다. 나는 이 산책을 끝내고 싶지도, 그렇다고 아프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네게서 벗어날 기회를 주더라도 나는 그 기회를 버릴 것이다.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사실과 더 가깝겠지만. 나는 끝까지 미련하고 멍청하다. 그런데 그래야했다. 나는 네게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랑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바다를 보러 올 것이다.